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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록,필사

030 <소설>해가 지는 곳으로/“사람이 무엇인지 잊지말아야 해”

by 쑥잼 2020. 10. 19.

"모두 나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살아남아서, 이곳까지 와서 또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 나쁘고 나쁘다.

 살았으면, 그 무서운 것을 피해 살아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77쪽

 

 강렬했다. 섬뜩하고 슬펐다. 인간이란 겨우 이런 존재구나 싶어서.

 

 소설의 시작이 된 배경은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계에 퍼진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고,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국가도 질서도 없는 통제 불능의 상태. 어린 아이의 간을 내어 먹으면 병을 치료한다는 설정은 수궁가에서 모티브를 얻었을까? 토끼 간을 탐낸 용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까지 따져 묻진 못했는데, 사람 간을 탐내는 사람들은 너무 잔인하고 무서웠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종차별을 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존재는 슬프다. 사람의 간도 안 되고, 토끼의 간도 안 된다.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매우 빨랐다. 지체하면서 머무를 수 있는 안정된 시간과 공간이 아니기에, 빨리 빨리 이동하고 사건들이 일어난다. 재앙 속에서도 부유한 자들은 벙커 속에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고, 무기를 차지한 자들은 약탈, 폭력, 강간을 서슴지 않았다. 안정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약자는 존재한다. 사회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는 약자는 폭력에 더욱 더 무자비하게 노출된다. 여성, 어린이, 장애인... 미소는 여자 어린이면서도 장애인이다. 먹이 사슬의 가장 아래에 놓인 미소와 언니 도리는 서로에게 의지해 목숨을 이어간다. 

 

좀비가 나왔던 <부산행>이나 쓰나미로 인한 피해를 보여준 <해운대> 같은 재난 영화가 떠올랐다. 소설은 상상력을 더 자극하고,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 심연에 빠지게 된다. 현실에서 고민하던 사소한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자기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가 태양을 돌다보면 나타나는 밝고 따뜻한 계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서 그 계절을 맞이하는 것뿐인지도.".          - 23쪽

 

도리와 미소는 지나를 만난다. 지나는 재난 상황 속에서도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강한 정신력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55쪽

 

재난 이후에 생긴 건지의 꿈처럼, 1년 내내 따뜻한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며 살면 좋겠다. 자연에서 열매를 얻고, 물고기를 잡고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서 얻어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모두가 평화롭게. 현실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존재하고,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데 이런 삶을 꿈꾸는 건 그저 닿을 수 없는 꿈에 불과한 걸까? 

 

"함께 있어야 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해.".    - 97쪽

 

세계가 멸망하는 순간에 내가 짊어지고 갈 짐들은 무엇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사람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굳이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날들 동안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살피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하루하루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고인 물이 썩듯 삶은 권태로워지고, 나란 인간은 허영심과 욕망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들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나는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