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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록,필사

027 독서<<열세살의 여름>>-돌아가고 싶은 한 페이지, 나의 열 세살.

by 쑥잼 2020. 10. 15.

이윤희 작가의 만화책 <<열 세살의 여름>>을 읽었다. 수신지 작가님이 추천하셔서 읽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내 나이 열 셋이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친구들과 무리를 이루어 뭔가 재밌는 일을 작당하고(나쁜 짓은 안 했다), 지금이라면 절대 걷지 못할 거리를 걸으며 무한 수다 루프를 만들어내던 그 때. 청소년이 되기 시작했던 때여서 혼란스러웠고, 사회에 대한 비판에도 눈 뜨게 된 때. 또래보다 성숙했고,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던 때이다. 

 

만화 속 해원처럼 나도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다. 졸업식 날 그 아이에게서 꽃을 받았는데, 뭐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 아이도 내게 호감이 있었던 것은 여러 정황상 그렇다. 하지만 그 땐 서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들을 너무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 애는 인기있는 남자애였고, 나는 또래보다 성숙하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다. 1년 내내 같은 모둠이어서 일기장에 댓글도 써주고, 아이돌 음악 얘기 등 이런 저런 얘기가 잘 통했다. 4,5,6학년 3년을 내리 같은 반이 되어서 얼마나 심쿵했던지! 서로의 키를 재기도 하고, 친구 집에 가서 같이 모둠 과제도 하고, 친구 생일 파티라고 노래방에서 놀기도 했다. 매우 미화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지만 과즙 팡팡 터지듯 즐거운 시절이었다. 

 

여름 방학 때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방학 하기 전에 "내가 편지 쓰면 너도 편지 쓸거냐?", "그럼 쓰지. 내가 편지를 좀 잘 쓰지."라는 대화로 은근슬쩍 서로 마음을 전했고, 편지가 왔다. 내 여자 절친 중 한 명의 이름으로 . 그리고 나도 'from'에 우리 반 남자애 이름을 써서 답장을 보냈다. 별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가수의 사진이 박힌 편지지를 골라 보내준 마음과, 편지 속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얼마나 의미 부여를 했던지^-^

 

몇 번의 편지가 오갔고, 기분 나쁜 에피소드가 생겼다.  방학 중에 음악대회 연습 때문에 학교에 갔다. 나간 김에 우체통에 넣으려고 편지를 챙겨 갔다. 같이 연습하던 여자 아이들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 가방을 털어 그 편지를 뜯어 읽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거기에 있었던 한 명에게 그 얘기를 전해들었다.(전달자도 딱히 좋은 애는 아니었다.) 걔들은 소위 싸가지 없고, 엄마 치맛바람 쎈 집 애들이었다. 왜 남의 편지를 봤냐고 따질만도 한데, 조용히 지나갔다. '망할년들'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을 뿐. 

 

하지만 걔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남자애에게 전화를 해서 왜 **이랑 편지 쓰냐고 닦달을 했다고 했다. 이건 어떻게 내가 전해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후로 편지는 끊겼고, 개학을 했고, 우리는 별 일없이 또 친하게 지냈다. 

 

걔랑 친했던 한 남자애는 계단을 내려가며 "왜 쟤를 좋아하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걔를 좋아하던 한 여자애는 "내가 걔 다이어리를 봤는데 너 좋아한대."라며 시기어린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튼 걔가 좀 덜 인기있는 애였다면 고백 비스무리한거라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하다가, 아니다. 절대 고백 할 수 없는 구조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너무 인기 있는 남자애라서...

 

일단 한 여자애는 대놓고 1년 내내 일편단심으로 걔를 좋아한다고 공언하고, 왕 큰 사탕 바구니 같은 걸 선물로 매번 줬다. 고백하거나 공언하진 않아도 얘기하다 보면 정말 수많은 여자애들이 걔를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데, 왜 남들도 이렇게나 좋아하냔 말이다. 엉엉.)

 

시간이 지나고 나서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해본걸 엄청 후회했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면 난 반드시 고백은 해봐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고백 못할 것 같다. 거절당하지 않고 잘 된다 해도, 그랬다가는 따가운 시선들, 질투의 시선들을 어떻게 견디나? 

 

어쨌든 그 때도 다른 애들 눈치 속에서, 서로를 안 좋아하는 척 하며 꽁냥꽁냥 재밌게 학교 생활을 했다. 걔의 기억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 추억이 좋다. 20대 때는 고향에 가면 길에서 마주칠까 기대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늙었고 걔도 늙었을 텐데. 보고 싶긴 하지만, 건강하게 잘 살고 있길 바랄 뿐이다. 

 

이윤희 작가님의 만화의 배경이 1998년이고 주인공이 6학년이라서, 내 이야기 같이 공감하며 재밌게 읽었다. 

오랜만에 추억 여행도 하고 ㅎㅎㅎㅎ 사람은 재밌는 추억으로 사나보다.